결정, 또 결정들

by Stephen Davey Scripture Reference: Leviticus 17–20

우리는 매일 수많은 결정을 내립니다. 그중 많은 것은 사소한 것들입니다. 오늘 아침은 무엇을 먹을까? 오늘은 무엇을 입을까? 잔디를 깎을까 아니면 낚시를 갈까? 제 생각에는 낚시가 훨씬 더 영적인 것 같습니다.

이런 결정들은 인생을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교차로에서 내리는 중요한 결정들은 우리의 삶 전체를 바꿀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레위기 17장에서 바로 그 중요한 교차로에 서 있습니다. 이제 약 세 달 뒤면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부패한 가나안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이스라엘은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 결정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풍조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길을 갈 것인가? 이들의 결정은 바로 17–20장에 기록된 율법과 지침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들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시대를 초월한 원리를 몇 가지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 원리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오직 그분만을 예배할 때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미 그 점을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17장에서 새로운 율법을 주십니다. 그것은 성막 제사 제도를 떠나 어떤 동물도 제물로 바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7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다시는 그들의 제사를 염소 귀신에게 드리지 못할 것이니 이는 그들이 음행하던 것이니라.”

충격적인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은 은혜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정착시키려 하시는데, 그들은 광야에서 미신적인 어둠의 세력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믿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는 진노하시고 그들을 모두 치셔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시고, 오히려 새로운 율법과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피를 먹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피를 마시는 것은 당시 거짓 종교에서 흔히 행해졌던 관습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기를 먹기 전에 반드시 피를 다 흘려야 했습니다.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우리가 오늘날 아는 것처럼 생명이 피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그 시대에, 하나님은 이미 희생 제물의 피를 속죄의 표징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피는 생명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가리킵니다(베드로전서 1:19). 우리는 그분의 피로 값 주고 사심을 받았습니다(사도행전 20:28).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피는 생명의 본질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 생명을 내어주셨고, 그 결과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레위기 18장으로 넘어가면 또 다른 원리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직 그분의 말씀만을 따를 때 영광을 받으십니다.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흥미로운 사실은 애굽과 가나안에도 법과 규례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합법이라고 여긴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법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오늘날도 국가가 합법이라고 여기는 것이 반드시 성경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장에서 구체적인 성적인 죄들을 금하십니다. 애굽과 가나안에서 행해지던 죄악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들을 17절에서 “패역”, 22절에서 “가증한 일”, 23절에서 “패괴”라고 부르십니다.

30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결론내리십니다. “너희는 내가 행하라 명한 것을 지켜 가증한 풍속을 하나도 행하지 말라.” 즉,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따르라. 그러면 땅에서 만족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애굽과 가나안 사람들처럼 살면 너희도 그들처럼 불만족스럽고 소망 없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19장에서는 또 다른 원리를 배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거룩한 성품을 본받을 때 영광을 받으십니다. 2절은 이 장의 주제를 분명히 밝힙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그렇다면 거룩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완전한 거룩에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은 완전함이 아니라 삶의 방향과 우선순위입니다. 저는 거룩을 “당신의 발끝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라고 설명하고 싶습니다.

19장에서 거룩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3절), 우상을 만들지 않는 것(4절), 가난한 자를 돕는 것(9-10절)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이 장 전반에 걸쳐 15번이나 “나는 여호와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다”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협상할 수 없습니다.

저는 유명한 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놀라며 물었습니다. “당신이 성경을 읽는 건 처음 보는데, 왜 지금에야 관심이 있나요?” 그러자 그 배우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오.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있소.” 그러나 하나님께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실 때, 그것은 인생의 모든 즐거움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의 속임수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죄는 결국 패배와 절망, 불만족으로 이끕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백성을 향한 관심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20장에서는 하나님이 다시 거룩함의 원리를 강화하시며 피해야 할 15가지 죄를 나열하십니다. 2절에서는 몰렉을 숭배하는 것, 곧 자녀를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을 금하시고, 6절에서는 신접자와 박수를 찾는 것, 즉 악령과 죽은 자와 접촉하려는 것을 금하십니다. 9절에서는 부모를 저주하는 것을 금하시고, 그 외에도 수많은 성적인 죄들이 구체적으로 나열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하나님은 성적인 문제에 대해 매우 많은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적인 결정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생의 큰 교차로에 해당하며, 인생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혼 안에서만 성적 관계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 그분은 그분의 창조 질서를 거슬러 결혼과 성에 대해 불순종할 때 따르는 심각한 결과를 경고하십니다. 이 문제는 이스라엘에게뿐 아니라 모든 개인과 모든 나라에게 중요한 갈림길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과 가나안 사람들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것인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경고하시고 거룩하신 정의의 판결을 내리십니다.

200여 년 전, 우리나라의 한 건국의 아버지는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분의 정의가 영원히 잠들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나는 내 나라를 위해 두렵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대를 초월한 원리들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르고, 그분의 사역에 동참하여 길을 잃고 혼란스러우며 만족하지 못하는 세상 가운데 복음의 용서와 자유를 살아내는 것보다 더 위대한 삶의 투자는 없습니다.

결론:
우리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거룩을 추구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우리는 그분의 충만한 복을 누리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유익한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레위기 17–20장은 거룩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우선순위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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